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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교육 2 (훌러우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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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병기 댓글 0건 조회 2,346회 작성일 11-03-3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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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교육

1. 포스트모던의 교육학

독일 교육학회의 기관지요 독일어권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교육학지’는 1987년도 1호에서‘교육학과 포스트모던’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서구의 교육 철학 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포스트모던을 둘러싼 학문적 작업들과 연관되어서 80년대 중엽 이래로 끊임없이 포스트모던을 사유의 단서로 삼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오인탁, 1987:1). 우리나라도 90년대로 접어들면서 포스트모던에 관한 관심이 강하게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한국교육학회 교육철학연구회는 1993년도의 연차대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제로 다루었다(Ibid, 2).
포스트모던은 교육학에서 우리 시대의 정신을 밝혀주고 사고 방향을 제시하는 개념으로 찬양되는가 하면, 정반대로, 불행스러운 실패의 개념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대립적 수용의 태도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적이고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고도의 정신 활동이 요구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도 포스트모던의 개념을 피해 갈 수는 없으며, 이 개념이 유행처럼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 버리지는 않고 상당한 기간 동안 우리의 정신세계를 바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Ibid, 6).
포스트 모던적 교육학은 모던 이후의 교육학인가? 그러나 여기엔 분명히 다수주의와 교조주의로 크게 양분되는 오늘의 교육학의 성격과 방법론적 논쟁에 대한, 그리고 목적론적이고, 생산적 활동이라는 의미로 교육을 이해하는 흐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있다. 이 접근의 색깔과 형식을 사람들은 포스트모던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경우에 근대의 교육학에서 비판을 담당하고 있는 흐름은 포스트 모던적 교육학, 또는 다른 명칭으로 반 교육학이라는 주장이 된다(Ibid, 6). 그러므로 포스트 모던적 교육학은 여전히 개방적 물음이다. 또한, 포스트 모던적 교육학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이라는 말의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일치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Ibid, 6).
교육은 계몽기 이후로, 교육이 교육과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사실상 일종의 만들기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교육은 일반적으로 자연과학의 패러다임 위에 서 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의 개념과 자연의 개념이 도구적 이성의 우위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이미 오래전에 테오도르 릴트는 이러한 교육의 개념을 교육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들이라고 갈파하였다.‘만들기’로 교육을 파악하는 패러다임은 전통을 부정하고 교육의 역사에서 만드는 교육만을 고유하고 과학적인 교육으로 강조하며 다른 교육 현상들을 자신의 교육 이론 아래 독점하려는 모습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교육 과학적 합리성과 자연과학적 합리성을 하나로 보는 입장이 빚어내는 결과는 어떤 비판적 관계도 성립할 수 없는, 상이한 패러다임들의 공존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패러다임만이 이론과 실천에서 인정되는, 다시 말하면 만들기와 생산하기의 패러다임에 자신을 묶어 놓는 과학으로 교육학을 변질시켰다. 우리가 교육을 통제와 지배로 이해하고,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생산으로 파악하면, 결과적으로 모던 화된 교육학은 이론과 실천에서 교육학 자체를 제거하고 만다(Ibid, 7).
그러면 도대체 포스트모던 화된 교육학은 어떻게 성립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포스트 모던 화된 교육학은 전승되어 내려온 종래의 소위 모던 화된 교육학이 주장하고 있으며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거나 또는 여전히 그 한계와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체포되어 있는 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이다. 그와 같은 교육학은 세대의 관계와 성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교육학은 철저히 다수 적이어야 한다. 그러한 교육학은 어떤 주어져 있는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보편이나 일반을 포기하여야 한다. 그러한 교육학은 전체에게가 아니라 개인에게 무조건적 우위성을 부여하여야 한다. 교육학이 그러한 교육학이 될 수 있으려면 교육은 결코 기술이어선 안 되며 교육학은 결코 기술공학이어서는 안된다. 교육은 결코 생산이나 지배가 아니다(Ibid, 7).
사실상 포스트모던 화된 교육학의 시초를 도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플라톤의 폴리테이아에서, 루소가 에밀에서 그렇게나 새롭고 치밀하게 서술한 반 교육 이론에서, 니일의 비 권위주의적 교육의 이론과 실천에서 포스트모던 화된 교육관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화된 교육학은 인간의 교육을 사회적 존재의 차원에서 의식하고 사유한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화된 교육학은 반교육학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한 교육이론의 과제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보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나 신념체계는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결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일 수 없으며, 특정한 관점과 가치관 하에서 형성된 하나의 해석체계일 따름이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 정전(正典)으로 신봉되는 표준화된 지식들은 특정한 계층이나 인종, 성(性)의 관점에서 쓰여 진 왜곡된 지식에 불과하며, 이를 보편타당한 것인 양 가르치는 학교란 문화적 폭력의 현장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지식의 절대적 객관성과 합리성 그리고 이성의 순수성과 보편성에 대한 가정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온 교육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허구적인 것으로 비판된다. 그리고 객관적 합리성이 계발된 개인의 형성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로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전통적 신념은 특정한 집단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지배를 정당화하고 영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조화태, 1993:22,23).
오늘날, 많은 교육자들은 교육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뒤엎는 이러한 비판 앞에서 혼란과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실제 교육현장에 있어서 교사들은 상대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으로 이미 무장된, 다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에 부분적으로 물 들은 학생들을 대면하면서 무력화된 자신의 교육적 권위를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른바 포스트모던 문화에 물 들은 학생들이 교사나 학교가 갖는 지적, 도덕적 권위를 예전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을 뿐더러, 교사가 가르치고자 하는 지식과 신념의 보편적 의미나 가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교육에 주는 부정적 영향과 위기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Ibid, 23)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전개되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교육자 또는 교육이론가들에 부과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자신 있는 답변을 마련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있어서 사회적 희망과 비전을 추구해 나가기 위한 교육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한 교육적 비전을 새롭게 다지는 일이다(Ibid, 23).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을 교육에 접합시킨 교육이론의 형성이 모색되고 있지만, 그것이 이른바 후기자본주의의 소비문화 속에서 유행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비이성적, 부정적, 냉소적, 상대적, 개인주의적 문화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할 때, 그러한 이론은 단지 일과성의 유행성 이론으로 그 수명을 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 동안 인간의 사고를 지배해왔던 전통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변화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파악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교육이론에 있어서의 커다란 변화를 요구함과 동시에 많은 시사점과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시사점과 과제란, 요컨대, 인간의 능동성과 주체성, 인간의 합리성이 갖는 역사성과 개방성, 가치와 관여의 일치성, 대화와 사회적 협동의 중요성, 그리고 사회와 전통에 대한 보다 깊고도 변화된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교육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해 줄 수 있는 교육이론을 창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이론의 창출은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와 가치관에 의해 급격히 변모해가는 사회 환경에 교육이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변모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회 환경을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교육적 힘의 구축을 위해서 요구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Ibid 24,25).

3.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교육

3.1. 인식론적 전환

포스트모던 교육적 경향들은 기독교 교육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교육이라는 것이 앎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인식론적인 관점이 불가불 필요하다. 포스트모던사상은 교육학에 있어서 이러한 앎과 인식론에 대한 전환을 가져왔다. 근대적 앎의 개념, 즉 객관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인식론의 체계는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들면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은 바로 포스트모던 교육학과 기독교 교육학에 대전환을 가져오게 된 근원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앎에 대한 기독교 교육적 인식론은 무엇인가?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겠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교육적 인식론은 먼저 인격적 이라는 것이다. 앎의 주체가 객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앎은 존재로부터 완전히 독립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앎은 ‘나와 그것’의 관계라기보다는 ‘나와 너’의 관계이며, 순수하게 객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객관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근대 교육에서는 교사와 교육 내용의 분리라는 심각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교사의 인격적인 요소나 영성, 그의 삶과 교육은 분리되어 독립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격적 앎이란 교육에 있어서 암묵적 요소를 강조하며, 형상보다는 바탕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던 기독교 교육적 인식론의 둘째는, 특징은 공동체적 이라는 것이다. 앎의 주체로서 자율적 개인을 강조하는 서구 근대 인식론과는 달리, 신앙적 앎은 공동체에 뿌리 박혀 있어서 모든 지식은 공동체 및 사회 문화적 상황과 분리될 수 없으며, 모든 앎은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하는 공동체적 성경을 지닌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이 이원론을 거부하는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 신앙공동체에서는 학생과 교사가 분리되지 않고, 학생과 학생 사이가 분리되지 않으며 한 공동체로서 인식하기를 가르친다(박상진, 2002:48).
포스트모던 기독교 교육적 인식론의 셋째는, 상상적의 앎이다. 상상을 앎에서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는 객관주의적 근대적 인식론과는 달리, 새로운 교육인식론은 모든 앎에 상상적 요소가 있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지식을 감정과 의지로부터 독립된 좁은 의미의 인지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인을 포함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근거한 근대교육은 상상과 감성, 비유와 상징을 비과학적인 요소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주지주의적인 경향은 IQ만을 중시하는 왜곡된 지능 관을 낳았고, 음악, 미술, 체육, 그리고 다양한 지능들을 소홀히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식론은 지, 정, 의가 복합적으로 강조되는 보다 통전적인 방향으로 교육적 경향이 흘러가고 있다.
포스트모던 기독교 교육적 인식론의 넷째는, 참여적 앎이다. 객관주의적 인식론이 관객 주의적 의식을 강조하는 반면, 새로운 인식론은 앎의 주체가 지식에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하는데, 모든 앎에는 앎의 주체의 앎에 대한 헌신이 있음을 주장한다. 근대 교육의 학교 체제는 관객 주의적 인식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교실이 공연장이라면 학생들은 관객석에 앉아서 교사가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를 구경하는 구조이다. 또한 학교 자체가 사회와 격리된 채 현장 속에 참여하지 않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교사나 학생 모두가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지식을 현장과 괴리된 공간 안에서 배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앎의 주체가 앎의 객체에 이미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인격적 지식론과 공동체에의 참여를 강조하는 새로운 교육의 경향은 기독교 교육이 보다 참여적인 구조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손원영, 2002:38).

3.2. 상상에 대한 강조

최근 일반 교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상상을 강조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특별히 교육에 있어서 상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학자 중의 한 사람이 엘리옷 아이즈너(Elliot Eisner)를 들 수 있다. 그의 『교육적 상상』이라는 책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이 책에서 그의 교육에 있어서 상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기술공학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일러식 교육과정을 비판했다. 아이즈너의 타일러 모델에 대한 비판은 아이즈너가 주장하는 인지다원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인지다원주의는 지식의 다원성을 강조하는데, 시각적, 미각적, 후각적, 촉각적, 청각적 형태 등, 다양한 인지적 형태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을 사회적인 공적 개념으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표상형식(forms of representation)이다. 그러므로 표상 형식은 시각적, 청각적, 근육 운동적, 후각적, 미각적, 촉각적인 것 등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의 목적은 다양한 앎의 형태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특정 표상형식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지면, 그 형식을 사용하는 경향성이 증가하며, 특정 표상형식을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공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정도가 결정된다. 표상형식의 선택은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의 선택이며, 또한 세계를 공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의 선택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즈너는 인지에 있어서 상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갖게 되는 세계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갖고 있는 형상으로부터 나오며, 우리가 감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경험으로부터 형성된다고 본다. 즉, 개념의 형성 자체가 인간의 감각구조에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다. 아이즈너는 데카르트의 이원론과는 대조적으로 육체와 정신, 감각과 인지 사이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구조가 의식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며 그것을 통해 개념형성이 가능케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이즈너는 인간의 감정과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인지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비판한다. 즉, 인지는 앎에 관련되지만 감정은 단지 느낌에만 관계된다는 식의 분리적 사고를 비판한다. 그는 인지는 감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지가 없는 감정이 있을 수 없으며, 감정이 없는 인지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즈너는 보다 폭넓게 지식을 이해할 것을 주장하는데 인지는 모든 형태의 지각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교육은 그러한 지식에 대한 관점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엘리엇 아이즈너, 1994:55~57).
아이즈너는 인지와 감정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보다 폭넓은 지식을 주장한다. 또한 그는 다양한 표상형식을 통해 보다 통전적 교육을 강조하였다. 고전적 평가는 인지적인 측면만을 부각하였지만, 그의 주장대로 표상형식을 통한 교육은 방법과 폭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인식적 전환은 포스트 모던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3. 인격적 지식론

근대 인식론은 한마디로 ‘객관적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지식은 그것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다는 주장이며, 탐구하는 사람이 순수 객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그 지식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위 가치중립적인 지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이 근대 과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인식론은 이를 반박한다.
이에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학자가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이다. 그는 그의 책 『인격적 지식론』에서 그의 인식론을 담고 있다. 그는 관찰을 통해 순수하게 객관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서구 근대 인식론을 비판한다. 그는 앎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지식에 대한 객관주의적 관점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객관적 확실성의 이상을 근대적 우상으로 간주한다. 폴라니는 전통적 서구 인식론의 대안으로서 앎의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 정신과 육체, 이론과 경험이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인격적 지식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인식론은 주로 철학자들의 사유에 근거를 둔 것으로 체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경시하고 인식론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내용을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인식을 하는 동안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의미를 체험하는 통로와 과정이 논의에서 빠진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엄밀한 규칙과 측정으로 드러낼 수 없는 또 하나의 큰 영역에 토대를 두고 있고 이것은 오직 인식주체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명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명료화할 수 없는 지식이 묵지(tacit knowledge)이고 좀더 포괄적으로 기술할 때 인격적 지식이라고 한다. 묵지는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가진다. 그에게 있어서 아는 기술과 행하는 기술은 동일한 것이다.
인격적 지식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는, 묵지를 포함하는 모든 인격적 지식은 말의 경계를 뛰어 넘는 내용을 가진다. 둘째는, 인격적 지식은 신체를 거점으로 점차 확대되고 발전된다. 셋째는, 인격적 지식에서 종합적인 실재가 우리 내부에 오는 것은 사물들을 바라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우리 내부의 것으로 동화시킴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인격적 지식은 그 자체 내에 평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다섯째는, 인격적 지식은 개인의 소신이며 그 속에는 책임과 헌신이 포함되어 있다.
폴라니는 교육을 사회적 지식의 전달이라거나 혹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자기 수정의 과정이라는 관점을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지식 관에 비추어 지식이 단지 객관적으로 주어지거나 혹은 어떤 이래의 독점적인 권위 체에 의해서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그 발전을 확인하고 정당화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교육의 과정을 폴라니는 두 가지로 나눈다.
그 하나는 자기가 현재의 수준에서 계속 앞장서서 좀더 높은 존재의 실상을 체험해 나가는 배움의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높은 체험을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 전파하는 가르침의 과정이다. 발견적인 것이든 설득적인 것이든 모두 지식의 수준의 차이에 따른 논리적인 간극을 뛰어 넘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지만 전자는 개인 내부의 문제인데 반하여 후자는 개인간의 문제이다. 묵지를 배우는 과정은 인식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며 계속적인 체험과 내주를 요구한다. 인격적 지식은 외재하는 실재가 우리의 신체 속에 그리고 그 신체의 능력을 확대시키는 도구들 속으로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암묵적인 인식은 수동적인 관찰과 독서에 의해서보다는 직접 관련된 세계에 뛰어들어 오랜 기간에 걸쳐 활동하고 실습하는 과정에서 성숙한다. 배움의 과정은 문제의 발견, 내주 활동, 예측, 보조식의 재 조직화, 발견에 의한 만족의 순서를 가진다.
인격적 지식은 객관적 지식과 구분될 뿐 아니라 주관적 지식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폴라니는 인격적 지식은 객관적 지식이 파악할 수 없는 숨겨진 실재에 관련되기 때문에 주관적인 적이 아니라 ‘진정으로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폴라니는 지식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하는데 앎의 주체들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고, 이 사회 안에서의 상호통제는 과학자들 사이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합의를 도출해 내게 된다고 주장한다. 폴라니에 의하면 의사소통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같은 암묵적 추론을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 모든 상징, 비유, 그리고 언어는 이러한 공유된 암묵적 추측에 기인하는 것이다(박상진, 2004:58).
폴라니의 이론에 근거하여 교육을 파악해 보면 교사가 객관적인 지식을 순수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환상이다. 교사의 인격적인 요소, 교사의 비전, 교사의 열정, 교사의 눈빛, 교사의 신앙, 교사의 도덕성 등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교과서의 내용 자체도 객관적 일수 없지만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 역시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학생들에게는 교과서의 내용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교사의 영성과 삶, 인격이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Ibid, 58).

3.4. 뉴미디어 인식론

뉴미디어 시대의 도래는 교육에 있어서 멀티미디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는 교육공학적 변화만이 아니라 사물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인식론에 있어서의 변화와 커뮤니케이션 체제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삐에르 바뱅(Pierre Babin)은 그의 책 『디지털 시대의 종교』에서 미디어의 변화가 이런 점에서 인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을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영상문화 속에서의 시각적이고 이미지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기존의 문자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대체하고 있다.
바뱅은 마샬 맥루한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맥루한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 즉 매체가 메시지라고 주장하였다. 맥루한은 모든 현실과 다른 차원의 현실을 하나로, 통일된 체계로 보았다. 그에게는 전체의 시스템을 부분들의 상관관계와 더불어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매체가 메시지’라는 공식을 그리스도에게로 적용시키면서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그분이 행하신 모든 행적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고 했다. 그러기에 그는 “메시지가 회심”이라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바뱅은 멕르한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매체가 메시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단어와 단어의 배열이 활자 안에서 중요한 것만큼이나 변조가 시청각 언어에서 중요하다고 믿는다. 여기서 변조라는 것은 길이와 강도와 배음 그리고 다른 뉘앙스 등 다른 진동수를 말한다. 변조의 질이야말로 듣는 사람이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는 특정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 요소이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서 바뱅은 신앙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그의 내면에 발전시켰다.
바뱅은 새로운 기술 공학이 이 세상에 가져다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시각은 인간 존재를 신뢰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인류가 발명한 문명의 이기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서, 신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철학에 기인한다. 미래에는 전자 공학 기술의 풍요로운 발전에 힘입어 더욱 보편적이며 대화를 하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 구현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나아가서 자기 삶의 근원에 대해 더 많은 일깨움을 얻은 한층 영성적이고 내면적인 신비를 간직한 인간이 탄생할 가능성을 확신한다. 바뱅은 디지털의 사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삶의 방식에 적용할 때 더욱 풍요롭고 균형 잡힌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Pierre Babin, 2000:PC라인).
미디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탕과 형상을 구별하여야 한다. 이는 뉴미디어 인식론에 대한 기초이해이며 커뮤니케이션 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인데, 뉴미디어는 형상만이 아닌 바탕의 중요성을 일깨워지고 있다. 형상은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나오는 사람들이나 행위를 뜻한다. 미디어 언어에서 바탕은 시선이 가게 되는 초점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다. 잡지에 있어서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이아웃이다.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가사보다 진동이다. 뉴미디어는 이런 바탕의 언어가 형상의 언어보다 중요함을 말해주는데 이는 교육에 있어서도 잠재적 교육과정이 공식적 교육과정보다 더 영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뉴미디어의 도전은 교육을 전통적인 관점인 가르침으로서 보다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해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이정호, 1995:276~279).
지금까지 학교와 교회는 가르침을 통해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전달하는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신앙의 전달은 교리 교육으로 제한될 수 없다. 뉴미디어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매체라면 여러 가지 매체 중에서 우리 인격에 가장 적합하고 우리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스타일의 매체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인터넷이 될 수도 있고 간단한 인쇄물이나 시청각 몽타주 일수도 있다. 통상적인 커뮤니케이션 모델들은 뉴 미디어적 메시지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지적이고 명료한 내용의 전달이다. 그러나 시청각 미디어는 몸에서 몸으로 정해지는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교육을 새롭게 바라보면 그동안 그 중요성을 간과했던 다양한 바탕이 교육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이는 보다 중심을 움직이고, 지적인 설복만이 아닌 마음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교육으로의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4. 회심과 양육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포스트모던 기독교교육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육은 회심과 양육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며 이원론에 빠지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종교교육학파와 기독교교육학파 사이의 대립이 이를 대변해 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어왔고, 이러한 영향은 기독교 교육에서도 대두되었다.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회심교육이냐, 양육교육이냐의 이원론적 선택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먼저 유기체적 변환을 추구하는 과정철학과 과정 신학에 영향을 받아 엘리자베스 무어는 과정 신학적 기독교 교육적 모델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주장은 회심과 양육의 문제가 아닌 통전적 시각으로 교육을 바라보게 하였다. 존 웨스트호프3세는 신앙공동체이론을 통해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교육적 모델을 제시하게 되었다. 토마스 그룸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 기독교교육을 참여를 통한 성육신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기독교공동체와 구성원간에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서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4.1. 과정신학교육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기독 교육학 교수인 엘리자베스 무어는 그의 책 『심장으로 하는 신학과 교육』에서 과정신학에 배경을 둔 기독교교육을 전개한다. 과정신학은 1920년대에 출판된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제』와 『과정속의 종교』에서 제시된 과정사상과 그 후 이 사상을 신학에 연결시킨 찰스 하트손 등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과정사상을 기독교 교육과 연결하려는 시도는 1970년대부터 본격화 되었다.
과정철학은 교육학과 관련된 몇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과거, 현재, 미래의 통시성이 있다는 것, 둘째는, 학습과 성장의 주체인 학습자 개개인이 학습 과정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셋째는, 학습자 개인이 전체와 관계를 맺고 학생들의 관심과 흥미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 넷째는, 삶 전체를 위한 교육이라는 것, 다섯째는, 교육의 본성은 종교교육이며, 종교교육은 의무와 경외감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과정철학에서 교육은 사람들의 가능성과 환경에 적합한 지식, 지혜, 자질을 통해 그들의 발달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메리 엘리자베스 무어, 1998:41).
무어는 과정철학의 유기체 개념을 받아들여서 상호연관성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이는 모든 실재들이 다른 실재들과 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존재론적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무어는 모든 실재의 연관성이란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 지형, 날씨, 토양, 그리고 초월적인 실재까지 포함하는 연관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타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심장으로 하는 신학과 교육』에서 상호연관성 개념을 교육의 문제로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교육수행에 관계되는 모든 요인들이 교육의 현장이나 교육의 과정에서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시키려고 하였다. 이는 학교교육, 사회교육, 종교교육의 연관성과 아동교육, 고등교육, 계속교육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연관성의 문제를 포함시킨다.
과정철학은 ‘실재들의 상호주체성’을 언급하는데, 이는 모든 실재는 예외 없이 주체로서의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실재론적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무어에게 있어서 상호주체성의 인정이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구성원들의 관점과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모든 실재란 주체적 가치를 포함하는 모든 것으로서 동물, 식물, 바위와 같은 무기물도 포함된다. 이는 무기물을 포함한 모든 실재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정신성과 가치를 가지고 나름대로 경험을 하는 주체라는 기존의 과정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무어는 1983년에 쓴 그의 책 『기독교 교육의 새로운 모형』에서 연속성과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을 제시한다. 연속성과 변화 성을 각각 전통과 경험을 강조한다. 여기서 연속성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연관관계의 상태이다. 그리고 변화성은 연속성의 반대개념으로서, 어떤 점에서는 연관관계를 뚫고 들어가는 변형, 변환, 반전 등으로도 볼 수 있다. 무어는 교회란 신학 화 공동체, 해석 화 공동체, 그리고 변형 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인간에 대해 무어는 인간 본성에는 양극단에 서있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기를 희망하며, 과정 중에 있는 인간, 즉 교차점으로 이동하고 있는 인간을 탐구함으로써, 인간 존재와 교육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심장으로 하는 신학과 교육에서 교육이론의 배경이 과정신학임을 분명히 하면서 과정신학을 통한 교육방법에의 열정을 가지고 사례연구, 형태, 현상학, 이야기, 의식화의 5가지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적인 상징으로서의 심장에 대한 연구는 항상 육체와 관련이 있는 지성과 감성을 통합하는 교육에 대하여 총체적인 접근이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교육방법들을 살펴보면, 사례연구방법은 산 파식 가르침이라고 하여서 특정한 상황 속에서 진리를 끌어내는 것이며, 형태방법은 통합적 가르침으로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하고 조화시키는 교육이고, 현상학적 방법론은 성육신적인 가르침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고, 이야기방법은 관계적인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이해하고 관계를 맺어가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다. 의식화 방법은 해방적인 가르침으로 사회구조 안으로 들어가서 개혁을 이끌어내는 것이다(Ibid, 51-234).
최종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심장으로부터의 교육이란, 첫째는, 가르침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삶의 정신과 근원을 경배하는 것이다. 둘째는, 가르침은 다른 주체, 즉 다른 사람들, 다른 문화들, 다른 환경들의 다른 부분을 존중하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른 주체를 존중하는 것과 더불어 심장으로부터의 가르침은 또한 자시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다. 넷째는, 가르침은 하나님을 경배함이 다른 주체와 자신을 존중함이라고 할 때 당연히 심장으로부터의 가르침은 관계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심장으로부터의 가르침은 가르침의 사명을 존중한다. 여섯째는, 심장으로부터의 가르침은 교육의 과정 그 자체를 존중한다. 일곱째는, 심장으로부터의 가르침은 평범한 것을 존중한다.
결국 심장으로부터의 가르침은 교사들로부터의 영감에 대한 강조이다. 무어의 과정 신학적 교육방법론은 포스트 모던화된 기독교 교육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2. 신앙공동체이론

근대주의가 개인주의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이것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것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또 하나의 확장된 개인주의의 문제점을 지니는 공산주의와 같은 집단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의식은 인간이 더불어 사는 존재이며 진리도 더불어서 깨달을 때만이 진정한 진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 분야에서 존 웨스트호프3세나 엘리스 넬슨 같은 학자들은 소위 ‘신앙공동체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신앙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여 경험함으로써 사회화되고 문화화 되기 때문에 신앙을 논리적으로 변증하고 설득하는 것 이상으로 공동체 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웨스트 호프는 오늘날 기독교 교육이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다고 보면서 그러한 위기의 이유를 학교 교육적 패러다임의 문제에서 찾고 있다. 전통적 학교식 교수 패러다임은 의도적인 지식 전달은 강조했지만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사회화의 과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웨스트호프에 의하면 학교식 교수 패러다임에서는 종교에 관해서 가르칠 수는 있지만 신앙을 가르칠 수는 없으며 결국 가르쳐지는 것은 지식으로서의 기독교 내용뿐이다. 그는 이런 패러다임의 대안으로서 ‘신앙공동체-문화화 패러다임’을 제안하고 있다. 웨스트호프는 기독교 교육의 자리를 학교 교실로부터 신앙공동체로 옮길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신앙공동체 안에 참여함을 통해 한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문화를 내면화 하듯이 일종의 문화로서의 신앙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공동체 안에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고 상호 작용하는 공동체적 경험을 통해 신앙을 형성하게 되는 교육의 모델은 포스트모던 교육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4.3. 나눔의 실천

1970년대 후반부터 신앙공동체 중심 교육론이 취한 사회화이론 자체가 지니는 제한성에 대한 적극적인 대화의 관계 속에서 변증법적인 해석학을 교육이론에 도입한 사람이 바로 그룸이다.
그룸은 실천신학적 접근을 취함으로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적인 방법을 극복하여 이론과 실제를 함께 하는 프락시스를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종말론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독교 교육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공헌을 하였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의 거울이 아니고 문화를 변형시키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고, 기독교 공동체와 구성원간의 변증법적 관계는 교회의 계속적 갱신을 촉진시키며, 신앙의 성숙은 사회화가 아니라 ‘성육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룸은 과거와 현재에 집중된 사회화에 기초한 공동체 중심 교육론을 수정해서 미래에까지 교육적 관심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집중된 프레이리의 의식화 이론을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더욱 세련시켰다. 사회화의 수동성을 “의식화”의 능동성으로 바꾸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의식화가 지닌 제한성을 기독교 복음의 빛 아래에서 궁극적인 차원을 추구하는 성육화로 승화시키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의 교육학을 포스트 모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적인 참여를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종교교육이론은 해방신학에 근거를 둔 포스트모던 기독교교육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5. 거대담론과 이성을 극복하는 포스트모던 기독교교육

모더니즘의 특징 중에 하나는 거대 담론(Meta-narrative)의 추구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는 거대 담론이 아닌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원리가 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각 지역과 문화, 공동체, 삶의 자리마다 상대적인 기준이 있다. 웅장한 이야기는 오히려 소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면에서 포스트모던 기독교교육도 그들만의 목소리를 내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그것은 바로 여성 신학적 기독교교육과 생태 신학적 기독교교육이다. 여성 신학적 기독교교육은 남성위주의 거대담론을 피해 여성들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생태 신학적 기독교교육 역시 인간중심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관점에서 자연과 생태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바라보고 기독교교육을 이루어내려는 시도이다.
이와 함께 포스트모던 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이성중심의 사고에서 비이성, 비 과학, 비논리적인 관점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관점을 담은 포스트모던 기독교교육은 바로 영성 신학적 관점과 이야기 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교육이 있다. 이들 모두 이성과 논리, 과학적 사고를 뛰어넘어 내면과 상상, 직관적 인식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5.1. 여성 신학적 기독교교육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에는 네 가지 모델이 있다. 첫째는, 세계와 하나님을 분리하려는 이신론 적 모델(deistic), 둘째는, 유대 기독교 전통에 뿌리 깊이 박힌 모델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인간이 응답한다는 내용의 대화적 모델(dialogic), 셋째는, 가장 널리 알려진 모델로서 전능하신 왕이 그의 신민을 통치하고 백성은 그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보는 군주적 모델(monarchical),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기독교 전통의 강력한 배경이 되어 온 모델로 하느님이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역사 안에서 그것을 실현해 나간다고 보는 행위자 모델(agential)이 그것이다(샐리 맥페그, 1999: 137~140). 이러한 전통적 신학적 관점이 현대 포스트모던 시대로 오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별히 여성학의 대두와 함께 나타난 여성신학의 등장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남성의 이미지인 아버지로 묘사하는 가부장적인 모델이 기독교 전통신학을 남성중심주의로 왜곡시킴으로서 여성을 억압하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만드는데 기여해 왔다고 주장한다.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가부장제를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여성을 거세하는 체제라고 단언한다. 하늘의 위대한 가부장으로서 신비하고 임의적으로 보이는 의지에 따라서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는 성서적이고 대중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는 수천 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해 왔다. 인간의 상상 안에 기독교에 의해 그럴듯하게 유지되어 온 아버지 하나님의 상징은 차례로 여성들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올바른 것으로 체계화하여 이러한 사회 형태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에 봉사해 왔다. 이와 같이 메리 데일리는 가부장적 하느님의 이미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현상을 합법화하는 역할을 해 왔다고 본다. 여성신학은 남성을 상징하는 표상들, 남성 본위의 언어, 여성과 남성의 계급적 문화를 우리의 언어와 사고의 세계에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로 보는 통념에 도전한다(메리 데일리, 1996:65).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가부장적, 군주적 모델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도르테 죌레는 하나님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상상하는 권위주의적 종교가 나치즘에 복종과 유태인 대학살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과정신학자인 존 캅과 그리핀은 하나님의 주된 속성이 모든 피조물의 완성을 이끄는 반응하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볼트만도 위계주의와 개인주의를 뒷받침하는 기독교의 군주론 적 일신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5.2. 생태 신학적 기독교교육

생태학문제에 대하여 크게 3가지 관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보고 있다. 첫째는 오늘의 환경위기를 인간중심주의의 사고 틀에서 원인을 찾고 탈 인간중심주의를 외치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 그리고 인간의 자연 지배를 남성의 여성지배와 같이 보고 여성의 주체성, 영성회복을 근간으로 하는 여성생태학(ecofeminism)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생태계 파괴를 인간과 인간의, 즉 생태계 위기 사회적 요인을 상기시키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등이 있다. 보프를 중심으로 한 해방신학자들의 생태담론은 일차적으로는 사회생태론과 깊이 연루되고 있으며 의미론적으로는 여성생태학과도 일정부분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신학에 관심을 가졌던 레오나르도 보프는 이제 생태신학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는 해방신학과 생태담론을 다음의 관점에서 일치시킨다. 즉 현재 우리들 앞에서 피 흘리며 서 있는 두 약자, 가난한 이들과 자연의 절규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곤을 재생산하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사회체제 하에서 고통당하는 민중과 파괴적인 사회경제 체제 및 과학기술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있는 자연은 모두 해방되어야 할 주체라고 하는 사실이다. 더욱 보프는 가난한 민중들도 단순히 물질적 필요가 결핍된 존재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굶주림도 함께 갖고 있다고 보면서 자신의 해방신학에 있어서 ‘영성’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바, 이것은 모두 자연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럼에도 보프의 생태신학은 생태학적 위기는 언제든 사회적 생물학적 약자를 통해서 그 실상이 들어나는 것이기에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당파적 우위를 두고 있다. 인간에 대해서는 자연의 편에 그리고 남성의 편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자연지배적이며 경제주의적인 서구 중심적 세계관, 가치체계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회정치구조의 변혁을 통해 가난의 악순환도 끊고 소비 지향적인 삶의 양심의 변화도 가능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보프역시 생태신학을 위해 인간의 신비적 종교적 체험을 중시한다. 사회변혁, 구조변혁의 힘이 여기에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보프는 기독교적 심비를 정치적, 해방적 그리고 명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 영성은 현재 상태로서의 세상은 그대로 인정치 않고 창조 신비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변혁시키는데 참뜻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구미정, 1998:113).
생태 신학적 기독교육학은 이러한 생태신학자들의 입장에서 기독교교육적으로 접목하여 교회와 사회의 생태적 관심을 이끌어 내는 교육학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입장의 기독교교육은 이제 출발단계라고 볼 수 있다.

5.3. 영성 신학적 기독교교육

포스트모던 현상 중세서 또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영성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경향 중 교육과 관련하여 파커 팔머(Parker Parmer)가 쓴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은 영성 교육에 대한 큰 통찰을 가져다준다. 팔머는 그동안 교육이 한쪽 눈에 해당하는 지성의 눈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마음의 눈을 함께 떠서 온전한 시각을 가질 것을 주장한다. 팔머는 그동안의 교육이 마음으로부터 머리를 분리시켰으며, 느낌으로부터 사실을 분리시켰고, 실천으로부터 이론을, 배움으로부터 가르침을 분리시켰다고 지적하며, 서로 상반된 것들을 통합하고 세상을 통전 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지녀야 할 것을 주장한다(Ibid, 114).
팔머는 교육을 영적 형성으로 보았는데, 이런 교육의 가능성을 영적 공동체인 수도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오늘날의 교육이 수도원 전통에서부터 세 가지 영적 훈련을 배울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신성한 문헌들에 대한 연구, 기도와 관상훈련, 그리고 공동체의 공동생활을 들고 있다. 팔머는 가르침을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어 지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근대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머리에 지식을 넣어주고 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러나 팔머는 교육이란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오히려 비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침묵’을 들고 있다. 침묵 외에 교육적 방법으로 환대와 기도가 중요한 교육적 방법이라고 보았다. 교사는 이러한 교육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침묵과 고독과 기도를 통하여 깊은 영적 훈련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5.4. 설화 신학적 기독교교육

70년대가 시작되면서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새로운 접근법으로 등장한 설화신학은 기독교교육에 많은 통찰을 준다. 설화는 삶에 진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과 행동에 힘을 발휘하며 인간의 상상과 행위에 대한 설화의 능력은 기억할 수 있고, 움직이는 방법으로, 우리 자신과 사회와 우리의 세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능력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의 구성위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서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설화를 통해 삶의 이야기, 정경이야기, 그리고 공동체 이야기가 하나가 되며 그 속에서 우리의 비전을 발견하고 모방이 아닌 행동하는 방법과 응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초월성을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게 된다(양금희, 1999:17).
신앙발달이론으로 잘 알려진 제임스 파울러는 그의 책 \'Weaving The New Creation\'을 통해서 설화 신학적 입장을 표명했다. 파울러는 이 책에서 실천신학으로서 기독교교육의 학문적 내용을 담고 있다. 파울러는 새로운 기독교교육 패러다임의 교육 신학적 구조를 하나님의 프락시스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참여로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소명’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공교회’로 구성했다. 즉 그는 기독교교육의 과제가 우리 시대의 희망찬 프락시스를 보고 이에 응답하는 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파울러는 하나님의 프락시스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전기와 설화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으며 설화신학자 샐리 맥패이그와의 대화를 통해 발전하고 팽창하는 우주의 과정내의 하나님의 참여를 묘사함에 있어서 비유적 변형을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설화신학은 기독교교육에서 하나님의 프락시스를 이해하기 좋은 방법으로 사용된 듯하다(Ibid, 15).

제5장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교육의 목표

기독교교육은 과거의 시대에도 그랬고 현재의 시대도,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도 여전히 변화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가고 더 좋은 것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며, 더 악한 것으로, 더 복잡한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시대에 올바른 기독교교육의 중요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된다. 일반교육은 일반 교육대로 교육받는 사람이 장차 거기에 가장 헌신할 가치 있는 것을 전수해 주는 일로서 바람직한 정신상태를 도덕적으로 온당한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실현하는 일, 또한 지식과 이해, 그리고 모종의 생기 있는 지적 안목과 그가 장차 거기에 헌신할 가치 있는 것을 전수해 주는 일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기주의, 물질주의로 더 퇴색되어 갈 것이며, 또한 기독교교육은 일반의 교육의 가치관과 더불어 기독교에 대한 교의적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치관은 무너지고 일반교육을 따라잡기에 급급한 나머지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교육과 함께 타락의 길로 발을 맞추어 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에 과연 기독교교육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교육의 관건이다.
지금까지 4장에 거처 기독교 초기로부터 포스트모던 시대까지의 기독교교육의 흐름을 파악하고 중요한 사상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기독교교육의 목표는 그들을 가르쳐서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은 것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도록 하며, 또한 그들이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그 목표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올바르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를 토대로 본장에서는 기독교교육이 가지는 참 목표는 어디까지에 이르러야 하는가에 대하여 제언하려고 한다.

1. 기독교교육의 목표

1.1. 회심하도록 해야 한다.

1.1.1. 회심(回心)의 뜻

회심이란(Repentance) [방향을 바꾼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슈-브 bWv(shub)], 그리스어 [에피스트레포- ejpistrefw(epistrepho)], 또는 [스트레포-]를 어원으로 하는 말로서, 구약에 있어서는 개인 또는 국민이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일(참조: 신 30:10,왕하 17:13,시 51:13,사 55:7등)을 말하는 것이고, 신약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회개 및 신앙과 결합하여 쓰이는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행 3:19,11:21). [돌이킴](마 13:15,18:3), [주께로 돌아감](고후 3:16), [하나님께로 돌아옴](살전 1:9)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미션 예화 명언 성구사전 CD)

회개(Repentance)는 과거의 생각 또는 행동에 대해 단지 후회하는 것을 뜻 할 수도 있으나 (‘나함’ם󰖏󰗺 헬.‘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 그 가장 충분한 의미에서 이 말은 과거에 임한 심판을 포함한 완전한 방향 전환과 미래에 대한 신중한 방향수정을 뜻하는 개념이다. (히. ‘슈브’bWv “돌아가다, 돌이키다”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a- ’마음을 고치다, 회개하다, 메타노이아, 회개”). 그 자체로서 이 개념은 변개에 포함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인 것이다. (헬.‘에피스트레-포’‘επιστρέψω) (아가페 성경사전, 1991: 1762)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보면 ‘회심’이라는 뜻은 예수를 영접하기전의 모든 옛 마음이나 생활, 그리고 모든 습관들이 자신을 위하여 행하여졌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새로운 마음과 습관과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향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나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 할 수 있겠다.

1.1.2. 회심해야할 이유
회심 에는 소극적인 회심과 적극적인 회심의 양면성을 들 수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의 회심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과 습관들을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지만(시 51:3, 요일 1:9) 적극적인 면에서의 회심은 과거의 후회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옛 마음이나 생활의 습관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새로운 각오와 행동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다. (눅 15:20). 이와 같이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회심은 매우중요하다.
이와 같이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죄를 깨닫게 하고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꾸준한 신앙교육이 있어야하며 그들이 회심되도록 하여야 한다. 온전한 회심을 위해서는 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확실히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1.1.2.1. 구약에서의 죄

인류의 역사 안에서 있는 죄의 기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역시 아담의 낙원에서 범죄 함과 더불어 시작한다.(창3장) 아담의 범죄는 인류의 연계성 때문에 아담뿐만이 아니라 모든 후손들에게도 파급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의 죄의 개념은 거의 동의어로서 씌어지는 [악], [어리석음], [미련함] 등등 실로 많다. 그러나 이렇듯 수많은 단어 중에서도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인의 죄의 개념을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세 가지 말이 있다. 그것이,[죄]라는 말과 [불의] 및 [허물]의 셋으로서 말한다. 첫째로 [죄]로는‘하타’(אּ󰗪󰖎) 이것은 본래 [표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삿 20:16, 잠 8:36) 등의 뜻으로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행위를 말하며, 둘째로 [불의]는‘아원’(ןוע) 으로서 [사악한 행위를 의미하고, 의도적, 의식적인 악]을 나타내며, 셋째로 구약성경의 죄악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허물] ‘페샤’(ע󰚃פ)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왕상 12:19,사 1:2,호 8:1). 이것은 하나님에의 반역으로서의 죄의 신학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는 말이다. (참조: 미션예화 명언성구사전, 아가페 성경사전 ,1528)
이와 같이 구약을 대표하는 죄의 개념은 모두,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시키고, 자기 임의대로의 행동에 몸을 맡기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외적인 죄이다. 이 같은 죄의 기원을 잘 묘사되어 있는 기록이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범죄 타락의 기사이다.

1.1.2.2. 신약의 죄

신약성경에 있어서의 죄를 나타내는 중심적인 말은 헬라어 명사 [하마르티아 aJmartiva(hamartia)]인데, 이것은 동사 [하마르타노-aJmartavnw (hamartano)]로 죄를 짓는다,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를 어원으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 세계에 있어서는, 다만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등을 의미하는 통속어로 씌어진 말이다. (미션예화 명언 성구사전 CD)

신약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죄인 것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이다. 즉‘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는 구절이다(눅 15:18,21). 여기서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서 이해되고, 회개는 그 죄가 사해짐이라고 말해진다. 죄에 관하여 바리새인들은 외견적 행위를 문제로 한데 대하여, 예수는 내면적 동기 및 심정을 문제로 하셨다(마 5:21-22,15:1-20).
구약의 죄의 개념과 신약의 죄의 개념을 종합해 볼 때 죄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내면적인 세계까지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죄를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죄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인간은 죄의 보편적 사실로 인해, 자기의 범한 죄의 책임을,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 교육에 있어서 회심시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벌 코프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긴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율법 수여자를 공격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를 형성하는 (시97:2) 신성불가침의 하나님의 의를 침범하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흠 없는 거룩함에 도전하는 것이다. (벧1:16) (벌 코프 조직신학 상, 1991: 475)

이와 같은 내용을 볼 때 누구든지 회심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뿐이다. 더 나아가서는 사도행전 2:38절에서는‘ 너희가 회개하여’엡1:7절에서는‘그리스도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이외의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 목표가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우선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교육 목표는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회심하고 하나님께로 먼저 돌아가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심은 기독교교육의 첫 번째 목표이다.

1.2. 성화가 되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회심하였다고 하여 교육이 끝이 아니다.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교육되어져 나가야 하는 목표를 세워야한다. 그것이 점진적 성화에로의 교육이다. 골로새서 1:28절에는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고 하였다.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자\'가 되기 위해 권고와 가르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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